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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래서, 어쩌면

폭낭과 먹쿠슬낭

by photobuntu 2025. 3. 25.

어릴 적 내가 살던 마을 윗동네 삼거리에는 '댓돌'이라 불리던, 마을 어르신들이 앉아서 쉬던 쉼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주 커다란 '폭낭' - 제주 방언. 표준어로는 팽나무. - 두 그루가 길 양쪽을 마주 보며 서 있었다.

 

  그 댓돌과 퐁낭은 더운 여름날 어르신들의 쉼터와 그늘이 되어 주었을 뿐 아니라, 윗마을, 아랫마을 할 것 없이 마을에 사는 모든 아이들이 놀이터가 되어 주던 곳이었다.

  그런 댓돌과 퐁낭이 얼마 전 마을 안길 확장 공사로 퐁낭 한 그루만 남겨 놓고 모두 사라져 버렸다.

  하나 남은 퐁낭 한 그루도 마을 토막이 어르신들이 마을 수호목이라 옮기면 안 된다고 반대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고,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그 한 그루마저도 관상용으로 팔려 갔을 것이다. 내가 어릴 적에도 성인 남성 두 명이 안아야 안을 수 있을 정도로 굵었던 나무라 못해도 수령이 70년은 넘었을 나무인데 말이다.

 

  사실, 나는 미신 같은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마을 어르신들처럼 그 나무가 수호목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댓돌과 퐁낭들이 사라져도 상관은 없다. 단지, 나의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장소와 나무 하나가 사라져 조금 안타까울 뿐.

 

  어릴 적 댓돌에서 두 퐁낭을 각자의 본부로 삼고 아이들과 함께 '팡독독'이라 부르던 술래잡기 놀이를 하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댓돌 옆에 자리를 잡고 있던 또 다른 나무 하나도 있었는데?

  그래! '먹쿠슬낭!'

  제주방언으로는 먹쿠슬낭, 표준어로는 '멀구슬나무'라 불리던 나무도 그곳에 있었는데, 언제부터 없어진 거지?

  나와 아이들에게 대나무로 만든 활의 총알이 되어 주던 나무였는데...

  이상하다...

  언제부터 없었던 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야 그 나무가 사라졌다는 걸 인지했을 정도로...

 

  갑자기, 이상하면서도 씁쓸한 감정이 내면에서부터 꿈틀거리며 올라온다.

 

아마도 추억이란 것이 그런 존재인가 보다.

화분에 심은 화초와 나무들처럼 주기적으로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지 않으면,

기억에서뿐만 아니라 인지의 영역에서조차 사라져버리는 존재.

실체가 없는 허무한 존재.

그래서 사람은 추억에 살지 말고, 현실에 살아야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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