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적에는 여름이 오기 전 이웃 아낙내들이 모여 제주도 사투리로 '갈중이'라 부르는 갈옷을 만들곤 했다.
어린 시적 내가 살던 집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키다리 아저씨만큼이나 큰 커다란 감나무에 작은 감들이 한가득 열리는 집이 있었다. 그 감나무는 가을만 되면 어린 내가 지나갈 때마다 주황색 예쁜 몸을 흔들며 자신을 한입 먹어 보라고 유혹하곤 했다.
손을 뻗으면 가지 아래에 달린 감을 딸 수 있을 정도로 키가 자라서야 나는 그 감 하나를 몰래 따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예쁘고 맛있게 보이던 그 모습과는 달리 상상을 초월하는 떨음에 나는 깨물었던 감을 얼른 뱉어내고는 "너, 나 속였어!!", "이렇게 맛없는 감을 왜 키우는 거지?"라며 구시렁거렸다. 그 후에는 아무리 그 못된 감나무가 나를 유혹하려 들어도 다시는 녀석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 다시 간 그 집에서 이웃 아줌마들이 모여 설익은 감을 따고, 딴 감들을 고무대야에 넣고 열심히 방망이를 두드리며 빻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엄마, 지금 뭐하는 거야?"
"갈중이 만드는 거야. 네 반바지도 하나 만들어 줄 테니, 저기서 놀고 있어."
어머니의 설명을 듣고서야, 나는 그 감이 먹기 위해 키우는 감이 아니라, 갈옷을 만들기 위해 키우는 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아줌마들이 감을 빻는 모습을 지켜보다, 나는 아주머니들이 휘두르는 방망이에 맞아 껍질이 벗겨진 감씨의 하얀 속살이 왠지 맛있게 보여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저거 먹어도 돼?"
"어, 먹어 봐. 맛있어."
어머니 말에 하얀 감씨 하나를 주어 입에 넣어 본 나는 아주 달지는 않았지만, 단맛이 나면서도 쫄깃쫄깃한 젤리 같은 감씨의 식감에 빠져 버렸고, 그 후부터는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다는 갈옷에 대한 관심은 저 멀리 가버렸고, 어떻게 하면 아주머니들이 방망이를 피해 하얀 감씨를 주어먹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런 추억이 있음에도 나는 갈옷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지금에는 패션으로도, 일상복으로도 갈옷이 어느 정도 주목을 받는 시대가 되었지만, 내가 어릴 적 그 당시는 다들 힘겹고 어렵던 시기라 촌에서 갈옷은 일할 때나 입는 일복에 불과했고, 어른들은 입으면 시원하다고 했지만, 어린 내가 느끼기에는 그저 까끌까끌하고 꾸깃꾸깃한 볼품없는 옷에 불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근처 시장에만 가도 예쁘고, 멋있는 신식 옷들이 많이 들어오던 때라 어린아이의 눈에 갈옷같이 촌스러운 옷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여하튼, 지금도 갈옷은 별로지만, 감나무를 볼 때마다 감씨의 하얀 속살이 그리워지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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